상생할 순 없는 건가요?



(기사와 관련 없는 사진)

허리 한 번 펴지 못하고 일해야 겨우 배송 시간을 맞출 수 있다. 끼니도 거르며 물건을 배달하지만 "왜 이제 왔냐"는 핀잔이 돌아온다.

허겁지겁 김밥을 입에 밀어 넣고 다시 시동을 걸었다. 오후 2시 반, 물류창고로 돌아가 남은 물량을 차에 싣고 2차 배송에 나선다.


죽을 것 같이 힘들다가도 "고맙습니다"라는 주민의 한 마디에 고단함이 씻긴다.


그런데 최근 '차 없는 아파트'를 내세운 단지가 들어서면서 일이 부쩍 늘어났다. 차량은 정문 앞에 세워두고 수레에 택배를 실어 일일이 날라야 한다.


어떤 단지에서는 손수레 소리마저 시끄럽다며 민원을 제기했다. A씨는 자신이 머슴인지 택배기사인지 헷갈릴 때가 잦다.








요즘 경기도 남양주 다산 신도시가 택배 전쟁으로 뜨겁다. 주민들은 안전사고를 우려해 단지 내 택배 차량 진입을 막았다.


무거운 짐을 일일이 옮겨야 하는 택배기사는 배달 거절로 맞불을 놨다. 


안전과 노동 강도. 사람 키만큼 쌓인 택배들 사이로 좁힐 수 없는 간극이 팽팽히 맞서고 있다.


각자의 이해관계를 고려하면 이번 갈등이 누구 한쪽의 잘못이라 단정 짓긴 어렵다.


그런데도 비난의 화살이 유독 아파트 측에 쏠리고 있는 건 관리사무소가 배포한 '통제협조 안내문'이 외부에 알려지고 나서 부터다.






(온라인 커뮤니티)


여기엔 택배기사가 배달을 거절할 시 대응하는 방법이 담겨 있다.


기사가 정문으로 찾아오라고 하면 "카트로 배달 가능한데 그걸 왜 찾으러 가야 하죠? 그건 기사님 업무 아닌가요?"라고 되물으라 안내한다.


또 아파트 출입이 막혀 반송한다고 할 시 "카트로 배송하면 되는데, 걸어서 배송하기 싫다고 반송한다는 말씀이신데 그게 반송 사유가 되나요?"라고 대응하라 적혀있다.


그러면서 이러한 행동이 아파트의 '품격'과 '가치'를 위한 것이라며 주민들에게 협조를 구했다.






(기사와 관련 없는 사진)


'갑질' 논란은 바로 여기서 불거졌다.


누리꾼들은 협조와 상생을 논하기에 앞서 택배기사가 감수해야 하는 불편함을 당연하게 여긴 아파트 측의 태도를 지적하고 나섰다.


실제로 이곳을 담당하던 한 택배기사는 "무게가 많이 나가 주민에게 주차장으로 나와줬으면 한다고 말하자 주민들이 '네가 뭔데 오라 가라 하냐'는 식으로 답해 마음이 아팠다"고 호소했다.


택배기사와 고객은 일정 사용료와 그에 합당한 서비스를 교환하는 계약 관계에 불과하다. 돈을 지불한다고 해서 기사를 머슴처럼 부릴 순 없는 것.







(기사와 관련 없는 사진)


하지만 아파트 단지 내에선 이러한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난다. 


주민의 안전을 지키는 경비원도 시설물을 관리하는 청소 노동자도 항상 '을'에 놓이기 마련이다.


주차 단속 스티커를 붙였다고 경비원 무릎을 꿇리고, 한겨울에도 전기장판 하나 없는 곳에서 청소노동자들을 쉬게 하는 일이 얼마나 무수히 일어났던가.


이번 사태는 그동안 알게 모르게 '갑을'로 규정돼 있던 아파트 주민과 서비스 노동자의 갈등이 '배달 보이콧'으로 번진 것이나 다름없다.





(온라인 커뮤니티)


다산 신도시 택배대란이 뜨거운 감자로 떠오르자 택배기사와 주민간의 '상생'을 이뤄낸 사례들이 대안으로 제시됐다. 


아파트 단지 어르신들이 각 가정으로 물건을 배달하는 '실버택배'나 택배기사가 잠시나마 쉴 수 있는 '한 평카페' 등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자발적인 양보와 배려만을 기대하기엔 우리 사회에 갑을문화가 너무나 팽배하다.


앞서 경비원 폭언·폭행 피해 사례가 잇따르자 부당한 지시를 법적으로 금지하는 개정안이 마련됐고, 지난해 9월부터 시행에 들어갔다.


처벌 규정과 기준이 모호하다는 지적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갑질 금지'를 명문화했다는 점에서 상징적인 의미가 있었다.






(기사와 관련 없는 사진)


이번 논란 역시 주민과 택배기사 간의 개인 거래로 볼 것이 아니라 갑질 행위를 막을 시스템에 집중해야 한다.


서비스 노동자에게 부당하고 과도한 업무를 강제할 수 없도록 구체적인 규정이 필요하다.


이는 아파트 입주민뿐 아니라 택배기사를 고용하는 택배사에도 책임이 있다.


살인적인 노동 강도를 줄이고 택배 분실 및 파손 책임을 기사 개인에게 떠넘기는 구조 역시 바뀌어야 택배노동자들의 눈물을 닦아줄 수 있다.




<출처>

황규정 기자 kyoojeong@insight.co.kr


http://www.insight.co.kr/news/1498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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